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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맨
종이 새하얀 종이보다는 한 번 쓴 종이를 녹여서 다시 만든 재생지가 좋다.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새로운 것보다는 조금은 때묻은 것들이 좋다. 당신의 처음이 내가 아니라고 해도 닳아버린 것들을 걱정한다 해도 닳아진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어서 좋다.
회피하지 마라, 그대 피하지 마라, 그래 사람이 가장 무섭긴 해도 가장 다정하기도 하다. 상처가 자꾸만 앞을 가리는가. 자꾸 남들의 향을 맡고 겁을 내는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주눅 드는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저 먼 세계에서 걸어 다닐 생각을 하느라 그대가 지금 밟고 서 있는 이 땅을 소홀히 여기지는 않는가. 사랑을 회피하지 마라. 사람에게서 떠나가려고 하지 마라. 당신에게 다가오는 설렘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면서 과연 먼 미래에 누군가를 품을 수 있을까.
비포장도로 내 삶이 삐걱거릴 때 너는 내게로 왔다. 비포장도로를 지나가면 느껴지는 충격들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격하게 여행하다 마음 한구석을 잃어버려 좌절하고 있을 때 너는 내 앞으로 왔다. 어색한 공기만 가득 차 있던 그 공간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벽이었던 내 마을을 크게 열고는 웃어주었다. 너라면, 너라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상상해도, 나락에 떨져도 좋겠다 싶었다. 영영 깊은 곳으로 추락하고 싶었다.
세상 생각하는 게 예쁜 사람이기를 바란다. 길어야 몇 계절인 겉모습을 꾸미기보다는 네가 가진 마음에 더 신경 쓰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그렇게 서 있다. 네게 부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네 옆에 여전히 서 있다. 그러니 너도 내 옆으로 와라.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마음을 들고서 너를 맞이할 세상을 꾸며놓을 테니.
허무함 상대의 가벼운 속마음도 모른 채 사람에게 깊게 기울이고 몇달, 아니 몇 년 사랑하다 보면 그때 깨닫게 되는 거지.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봤자 돌아오는 건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무함이라는 걸.
아픈 기억 잊지 못한겠다면 기억해요. 며칠을 시달렸던 그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당신이 왜 괴로웠는지. 당신이 누구 때문에 찢어질 듯이 아프고 엉엉 울었던 건지. 잊을 수 없다면 기억해요, 그 상처. 다시 그 속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괜찮다 당신이 힘들었던 것을 안다. 돌고 돌아 내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수히 걸었던 발걸음들을 안다. 나는 옆에서 걸어주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견뎌야 할 게 많다. 우리에게 세상은 정 없이 잔인하지만 당신은 은근히 여리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당신 옆에는 내가 있다. 당신이 곧 쓰러질 나무라고 해도 다 괜찮다. 내가 땅이 될 테니 서로의 삶을 부등켜안고 살면 된다.
사람 사람은 믿지 않는 나지만 사랑은 항상 믿을 수 밖에 없이 다가오고 사랑에 깊게 믿음을 쏟았다가 사람을 믿지 않게 되겠지.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그냥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넘기는 여유를 배우면 좋았을 걸.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싫어하는 사람 또한 있겠구나하고 너무 깊이 아파하지 말걸.
과정 힘들어하는 게 당연해. 네가 겪은 아픔을 나는 이해해. 세상에 일부러 실수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 부족하고 미숙한 탓에 저지르는 것이지. 너무 좌절하지 말고 상심하지 마. 다음에 더 신경 쓰고 조심해서 더 나은 내가 되어 가면 되는 거니까.
방향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해 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같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내가 걷는 방향으로 서서 옆에 말동무가 되어주며 걷는 것. 결혼을 한다면 나와 겉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겠다. 같은 곳으로 늙어갈 줄 아는 사람. 같은 곳으로 가는 따뜻함.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공원을 함께 걷는 것부터 시작하라. 바람이 불고 어둠은 내려앉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어보아라. 결국, 사랑은 같은 곳으로 걷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