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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폐허

Atomseoki 2017. 12. 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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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폐허

 

 

'연이의 발과 내 발을 맞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신발을 선물하지 않는다, 방에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 빈 가위질을 하지 않는다, 밤에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손톱 발톱은 낮에 깎는다, 사라의 이름을 붉은 글씨로 쓰지 않는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신 같은 말도 잘도 믿고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믿어야 할 사람에게는 의심을 품은 채 그 사람과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디 타인뿐이었던가. 삶의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믿으면 믿는 만큼 상처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나에게 '믿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 중에 가장 추상적이고 아득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 추상과 아득함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상대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보다는, '믿음'이라는 나의 감정이 언젠가는 닳고 지쳐 색이 바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온다.
 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지를 만들어내기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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